문득 궁금해졌다. 우리는 왜 그토록 몸매 가꾸기에 열을 올리는 걸까. 연예 뉴스를 볼 때마다 ‘명품 몸매’, ‘특급 몸매’, ‘끝판왕 몸매’같은 수식을 보면 한숨이 나왔다. 여성의 몸이 볼거리로 간단히 소비되는 데 수치심을 느꼈다. (그렇다. 나는 페미니스트다.) 그러나 동시에 내 다리가 설현만큼 길지 않아서 허리가 충분히 잘록하지 않아서 가슴에 골이란 게 보이지 않아서 절망했다. 좋은 몸과 나쁜 몸을 나누는 고정관념이 의식에 껌딱지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그렇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그러니 요가를 시작했다고 해서 단박에 달라질 리 없다. 난 여전히 내 몸매가 아쉽고(조금만 더 컸으면, 작았으면, 길었으면)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두렵다. 그러나 요가를 하다 보면 결국 이것이 내 몸, 내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평소엔 절대 쓰지 않을 근육들을 늘리고 비틀고 잡아당기면서 내 몸의 실체가 짙은 선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요가를 하다 보면 가끔 헷갈린다. 내가 맨몸으로 싸우는 건지, 혹은 내 몸과 싸우는 건지 당최 모르겠는 거다. 그런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결국 미우나 고우나 정이 든다. (매사 그렇죠?) 그러니 타인의 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은 몸과 나쁜 몸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어깨는 둥글고 예쁜 것으로 다가 아니다. 어깨관절이 유연해야 하고 뭉침이 적어야 하며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선 안 된다. 요가를 통해 깨달은 것, 그것은 어떤 몸이든 오랜 수련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건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당연한 얘기지만) 내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타인의 몸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요가 팬츠를 입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결연함, 뻔뻔함, 비장함 없이도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33-34
요가를 하면 몸이 가뿐해진다. 어깨의 힘이 빠지고 팔이 더 멀리 나아가고 허리가 유연해지며, 더 성큼성큼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온몸으로 자유를 실감한다. 그럴수록 여성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진다. 여성주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가 "무엇이 나 자신의 삶을 견디 만하게 하는가?"라고 물은 것처럼 여성이란 틀을 뛰어넘어 내 삶 전체를 관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난 분명 페미니스트다. 내 몸을 제약하는 것, 구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당하며 그것을 다른 누구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반면 현실은 나를 자꾸 '여자, 여자다운 것, 여자니까, 여자로서'에 가둔다. 남자친구는 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더 몸에 붙는 옷을 입었으면 좋겠고, 긴 생머리를 가졌으면 좋겠고, 순종적이고 환한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는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때마다 난 이게 얼마나 틀려먹은 생각인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게 아주아주 피곤한다. 한편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내가 여다자운 것에 얼마나 매여있는지를 생각한다. 세상이 기대하는 여성성 외에 나의 매력을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모르겠고, 애초에 무엇이 내 순수한 욕망인지 혹은 사회규범의 요구인지 그 구분이 모호할 때가 많다.
내 몸은 매달 생리를 한다. 강간의 위험 속에 살고 부당한 평가와 비교의 대상이 된다. 어떻게 하면 여자로서 나는 더 자유롭고 내 의지껏 살아낼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것은 깊고 깊은 숲속을 여행하는 것, 도서관에 앉아 밤 늦도록 책을 읽는 것, 내키는 만큼 걷고 또 걷는 것이다. 아마도 난 내 자유를 방해하는 것들과 계속 싸워나가야 할 것 같다. 여자로서의 내 운명을 온몸으로 힘껏 살아내기 위해서.
p82-84,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이아림, 북라이프
그러니 요가를 시작했다고 해서 단박에 달라질 리 없다. 난 여전히 내 몸매가 아쉽고(조금만 더 컸으면, 작았으면, 길었으면)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두렵다. 그러나 요가를 하다 보면 결국 이것이 내 몸, 내 자신이라는 걸 받아들이게 된다. 평소엔 절대 쓰지 않을 근육들을 늘리고 비틀고 잡아당기면서 내 몸의 실체가 짙은 선으로 각인되기 때문이다. 요가를 하다 보면 가끔 헷갈린다. 내가 맨몸으로 싸우는 건지, 혹은 내 몸과 싸우는 건지 당최 모르겠는 거다. 그런 실랑이를 벌이다 보면 결국 미우나 고우나 정이 든다. (매사 그렇죠?) 그러니 타인의 몸에 대한 관심이 줄어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좋은 몸과 나쁜 몸의 구분도 모호해졌다. 어깨는 둥글고 예쁜 것으로 다가 아니다. 어깨관절이 유연해야 하고 뭉침이 적어야 하며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선 안 된다. 요가를 통해 깨달은 것, 그것은 어떤 몸이든 오랜 수련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모든 건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당연한 얘기지만) 내 몸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타인의 몸을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요가 팬츠를 입을 수 있고 즐길 수 있다. 결연함, 뻔뻔함, 비장함 없이도 자신의 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p33-34
요가를 하면 몸이 가뿐해진다. 어깨의 힘이 빠지고 팔이 더 멀리 나아가고 허리가 유연해지며, 더 성큼성큼 걸어나갈 수 있게 된다. 온몸으로 자유를 실감한다. 그럴수록 여성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 더 행복해지고 싶어진다. 여성주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가 "무엇이 나 자신의 삶을 견디 만하게 하는가?"라고 물은 것처럼 여성이란 틀을 뛰어넘어 내 삶 전체를 관조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럴 때 난 분명 페미니스트다. 내 몸을 제약하는 것, 구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부당하며 그것을 다른 누구에게도 강요하고 싶지 않다.
반면 현실은 나를 자꾸 '여자, 여자다운 것, 여자니까, 여자로서'에 가둔다. 남자친구는 나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여성에 대한 판타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내가 더 몸에 붙는 옷을 입었으면 좋겠고, 긴 생머리를 가졌으면 좋겠고, 순종적이고 환한 미소를 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그는 이러한 생각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때마다 난 이게 얼마나 틀려먹은 생각인지 가르쳐야 하는데 그게 아주아주 피곤한다. 한편 남자친구가 아니더라도 내가 여다자운 것에 얼마나 매여있는지를 생각한다. 세상이 기대하는 여성성 외에 나의 매력을 어떻게 어필해야 할지 모르겠고, 애초에 무엇이 내 순수한 욕망인지 혹은 사회규범의 요구인지 그 구분이 모호할 때가 많다.
내 몸은 매달 생리를 한다. 강간의 위험 속에 살고 부당한 평가와 비교의 대상이 된다. 어떻게 하면 여자로서 나는 더 자유롭고 내 의지껏 살아낼 수 있을까. 내가 바라는 것은 깊고 깊은 숲속을 여행하는 것, 도서관에 앉아 밤 늦도록 책을 읽는 것, 내키는 만큼 걷고 또 걷는 것이다. 아마도 난 내 자유를 방해하는 것들과 계속 싸워나가야 할 것 같다. 여자로서의 내 운명을 온몸으로 힘껏 살아내기 위해서.
p82-84,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이아림, 북라이프
'Keep'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요가와 생리 (0) | 2018.07.18 |
|---|---|
| '어정쩡한 게 좋아' (0) | 2018.07.02 |
| 내면아이 상처 치유하기 (0) | 2018.06.10 |
| 만에 대하여 (0) | 2018.06.10 |
| 요가와 문화 (0) | 2018.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