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쇼가 전하는 기적의 차크라


프로이트는 자신이 이것을 일별했다고 말했다. 그는 요가의 달인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요가에 정통한 사람이었다면, 그것을 이해했을것이다. 그는 그것을 '죽고자 하는 의지'라고 불렀으며, 모든 사람이 때로는 삶을 열망할 때가 있고, 죽음을 열망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인간에게는 살고자 하는 의지와 죽고자 하는 지이의 두 가지 정반대의 의지가 있다는 것이다. 서양 사람에게는 그것이 완전히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어떻게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한 사람 안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렇게 말했다. 인간은 자살을 할 수 있으므로, 죽고자 하는 의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동물은 자살을 할 수 없다. 동물은 다섯 번째 육체를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물은 자신이 살아있다느느 것을 자각할 수 없고, 알 수 없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는 것이다. 자살을 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필요하다.

삶에 대한 자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동물은 삶을 자각하지 못한다.


동물은 삶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삶을 자각하고 죽음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살할 수 있다. 죽음을 자각하게 되면, 자살을 감행할 수 없다. 붓다는 자살이 필요 없기 때문에 자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난센스이다. 그는 그대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죽일 수 없으며, 그저 흉내만 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살은 하나의 시늉이다. 그대는 진정으로 살아 있거나, 죽어있지도 않기 때문이다.그대가 삶에 강하게 집착해 있고, 그것에 너무 들러붙어 있어서 죽음을 완전히 부정하려고 한다면, 그대는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타인을 죽임으로써 그대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염원, 즉 죽고자 하는 의지를 충족한다. 이런 술수를 통해서 그대는 죽음에 대한 의지를 충족하고, 타인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은 죽을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처럼 엄청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런 사람들은 늘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런 죽음을 타인에게 투사한다. 타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죽음보다 더 강력하다고 느낀다. 그래서 타인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다. 기묘한 방식이지만, 타인을 죽임으로써 자신은 죽음을 초월했다고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에게 행해질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행하는 것이다. 그대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이게 되면 결국 그대는 자살을 하게 되는 셈이다. 그 투사가 그대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77p]


여섯 번째 육체에 있는 사람-여섯 번째 육체에 도달한 사람-은 만물의 죽음을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간주한다. 마하비라가 개미 한마리도 죽이지 못한 것은 비폭력의 원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만물이 죽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창조와 파괴, 즉 매 순간 만물이 태어나고, 매 순간 만물이 소멸한다는 것을 그대가 자각한다면, 그 자각은 여섯 번째 육체에 든 것이다. 어떤 것이 소멸하게 되면, 다른 것이 태어나게 된다. 태양이 소멸하면, 어디선가 다른 것이 나타나게 된다. 이 지구가 없어지면, 다른 지구가 나올 것이다.  [81p]


가장 낮은 영역에서 섹스는 그대에게 가장 깊은 수면을 제공한다. 그대가 좀 더 높은 아나하타 차크라로 올라가면, 수면은 매우 고요하고 안정되며, 정화와 정체의 효과를 준다.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대는 대단히 이완할 수 있다. 누군가 그대를 사랑하고 있으며,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그대를 이완시켜주고, 모든 긴장을 없애준다. 세상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이제 그대의 가정이 된다. 사랑이 있으면, 집은 가정으로 변형되고, 이방인은 이웃이 된다. 그 어떤 것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신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은 깊은 수면을 안다. 증오하면, 그대는 깊은 수면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화가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대는 낮은 곳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랑하고 연민을 가지면 그대는 깊은 수면을 이루게 된다.


수면의 문은 그대가 에고를 망각할 때 열린다. 그대가 잠에서 깨어있을 때보다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 쉬워진다. 잠들지 않고 깨어있을 때에는 에고가 매우 강력하게 활동하기 때문이다. 깊은 잠에 빠지게 되면 치유의 힘이 최고조에 달한다. 따라서 의사들응ㄴ 병들어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치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고 말한다. 치유는 그 사람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에고가 절대적으로 사라졌을때 치유가 가능하다. 에고가 존재하지 않을 때 치유의 힘이 내면에서 흘러나오고 용솟음치기 때문이다. [89p]


그대가 사랑을 놓쳤다고 느낄 때마다 그대의 육체는 음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음식이 대체물이 된 것이다. 사람들이 공허함을 느끼고, 사랑이 가져다 주는 환희와 열의와 에너지를 갖지 못하면, 그들의 육체는 음식으로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유년시절로 되돌아간다. 그런 사람들은 억압적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음식에 집착하는 법이 없다. 그런 아이들의 정신은 풍요롭다. 더 높은 것이 있는데, 왜 더 낮은 것에 연연 하겠는가? 

명심하라. 모든 종교는 특정한 이유 때문에 단식을 이야기해왔다. 그대가 음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진정한 기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단식은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부여한다. 나는 그대에게 단식에 집착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 자신을 고문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대가 음식 중독자라면, 기도는 그 치료약이 될 수 있다. 그대가 너무 많이 먹으며 살아왔다면, 균형을 찾도록 하라. 너무 많이 먹게 되면, 그대는 물질적인 것에 너무 집착하게 되고, 높은 창공으로 날아오를 수 없다. 그대의 짐이 너무 무겁다. 약간의 단식이 도움이 될 것이다.[93p]


파블로프 스키너와 여러 행동주의 학자들은 물질적인 사원, 물라다르 차크라 주변을 계속 맴돈다. 그들은 인간이 그저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들은 첫 번째 사원에 몰두하고 있고, 물질에 너무 매몰된 나머지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잊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을 오직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설명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열려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태도는 장애가 된다. 애초부터 육체 이외에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게 되면, 탐구 자체를 부정하게 된다. 이것은 편견이 된다. 공산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행동주의자, 무신론자와 같이 인간이 그저 육체적인 존재라고 믿는 사람들의 신념은 더 높은 실체들로 가는 관문을 모두 차단해버린다. 그들은 장님이 된다. 그리고 물질은 존재한다. 그것은 가장 분명하다. 아무런 증거가 필요 없다.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유일한 실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난센스이다. 그러면 인간은 모든 존엄을 읽고 만다. 내적으로 성장하거나 무언가를 향해 성정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삶에는 아무런 존엄이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사물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때 그대는 아무런 관문이 되지 못하고, 그대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일어나지 못한다. 그대는 육체일뿐이다. 그저 먹고 배설한다. 먹고 성교하고 아이를 낳는다. 이렇게 계속되다가어느 날 그대는 죽는다. 일상적인 사소한 일들이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삶의 의미가 있고 중요성이 있고 시가 있겠는가? 어떻게 춤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스키너는 , 자유와 존엄을 넘어서 라는 책을 집필했다. 그 책은 '넘어서'가 아니라 '자유와 존엄 아래로'라고 불려야 한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한 가장 낮고 추악한 입장이다. 육체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다는 점을 명심하라. 나는 육체에 반대하지 않는다. 육체는 아름다운 사원이다. 다만 육체가 전부라고 생각할 때 추악함이 생기는 것이다.[111p]


평범한 사람은 모든 위대한을 폄하하려고 애쓴다. 평범한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위대한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것은 상처를 준다. 이 모든 정신분석의 세계, 인간의 삶에 대한 그 해석은 평범한 사람의 복수와 같다. 그것을 경계하라. 물론 첫 번째보다는 좀 더 낫고, 그것보다는 앞서지만, 사람은 계속 나아가고, 계속 초월해가야한다. 세 번째는 심리적인 것이다. 아들러는 심리적인 세계, 권력에 대한 의지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매우 에고주의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 프로이트보다는 약간 더 열려있다. 그러나 문제는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섹스로 폄하하는 것처럼, 아들러는 모든 것을 열등감 콤플렉스로 폄하하는 데 있다. 사람들은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위대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열등감을 느끼고, 권력 지향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는 붓다, 그리스도, 크리슈나와 같은 사람들처럼 완전히 복종해서 자신의 여행을 권력의 여행이라고 부를 수없는 사람들을 보아왔기 때문에 이러한 시각은 전적으로 잘못되었다. 그리고 붓다가 꽃피어날 때, 그에게는 우월감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그는 존재계 전체에 고개를 숙여 절한다. 그는 그대보다 더 신성하다는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전혀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신성하며, 심지어 먼지조차도 신성하다. 그는 자신이 월등하다고 여기지 않으며, 누구보다 월등해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는 전혀 열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그는 왕으로 태어났다. 그것은 전혀 열등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애초부터 최고의 자리에 있었으므로, 열등감의 문제는 없었다. 그는 자기 나라에서 가장 부유하고 막강한 사람이었다. 권력과 재산을 더 이상 얻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아들러는 인간이 에고가 아닌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열등감과 같은 요소를 계속 찾으려 했다. 그것은 프로이트보다는 낫다. 조금 더 높은 단계이다. 에고는 섹스보다 약간 더 높다. 많이는 아니고 약간 더 높을 뿐이다. 현대 심리학은 아직 완벽한 학문이 아니다. 그것은 중간에 매달려있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하고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

그것은 경험적이기보다는 가설적이다. 그 학문은 여전히 고군분터하고 있다. [119p]


신성함을 이르는 산스크리티어는 바가바티이다. 신성하다는 말에는 기독교적인 의미가 일부 담겨 있기 때문에 신성하다는 말보다는 바가바티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바가바티는 바가반에 대한 여성형이다. 우선 반야심경은 바가반이라는 단어가 아니라 바가바티라는 여성형의 단어를 사용했다. 모든 것의 원천은 남성성이 아니라 여성성이기 때문이다. 그 원천은 양이 아니라 음이며,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이다. 아버지로서 신에 대한 기독교적인 의미는 아름답지 못하다. 그것은 남성적인 에고에 불과하다. 남성적인 에고는 신이 '그녀' 라고 생각하지 못하며, '그'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보라. 모두가 남성이고, 여성은 하나도 없다. 성부, 성자, 성령 모두 남성이다. 그것은 남성만의 모임이다. 삶에서 여성성이 남성성보다 더 근본적이라는 점을 명심하라. 오직 여성에게만 자궁이 있고, 여성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여성성으로부터 나온다. 그것은 왜 여성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오직 여성성만이 그것의 탄생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성을 통해서 생명이 나오는 것이다. 여성성은 수용적이기 때문이다. 남성성은 공격적이지만, 여성성은 수용하고 받아들인다.그래서 탄생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아버지는 부자연스러운 지위이다. 자연계에서는 아버지라는 지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라는 지위가 존재한 것은 불과 수 천 년의 역사에 불과하다. 인간이 만든 제도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자연스러운 지위이다. 아버지는 사유재산의 개념으로 인해서 세상에 등장했다. 아버지는 자연계가 아니라 경제계의 산물이다. 사유재산이 사라지게 되면-만약 그것이 사라지기라도 한다면-아버지라는 지위도 사라질 것이다. 어머니는 언제나 늘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어머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아버지가 없는 세상은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아버지라는 개념 자체가 공격적이다. 그대는 알고 있는가? 독일인들만 자신의 조국을 '아버지의 땅, 부국' 이라고 부른다. 그 외에 다른 모든 국가는 조국을 '어머니의 땅, 모국' 이라고 부른다. 독일 국민은 매우 위험한 민족이다. 자신의 조국을 아버지의 땅이라고 부름으로써 그대는 전쟁처럼 위험한 일을 벌이기 시작하고, 군화처럼 위험한 것을 발에 신기 시작한다. 조만간 공격성이 드러날 것이고,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그 씨앗이 거기에 존재한다. 신을 아버지라고 여겨온 종교들은 모두가 공격적인 종교들이었다. 기독교가 공격적이듯이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유대교의 신은 매우 화를 잘 내고 거만한 신이라는 것을 그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대교의 신은 이렇게 선언한다

" 너희가 나를 섬기지 않으면, 너희는 나를 반대하는 것이고, 나는 너희를 파괴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질투심이 강한 신이다. 오직 나만 섬기도록 하라!" 신을 어머니로 여겨온 사람들은 언제나 비폭력적이었다. 불교도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들은 무력과 강제로 단 한 사람이라도 개종시키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다. 이슬람교도들은 무력으로 사람들의 의지와 양심과 의식이 반하면서 그들을 개종시키려고 노력해왔다. [130p]


바가반이라는 말은 '축복받은 자'를 뜻한다. 그때 그 사람은 축복받은 자가 된 것이다. 이제 그의 축복은 영원히 그의 것이 된다. 그것은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독립적이 된다. 그것은 어떤 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므로, 빼앗길 수 없다. 어딘가에서 생겨 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본성이다. 그리고 그는 보살이라고 불린다. 불료에서 보살은 매우 아름다운 개념이다. 그것은 붓다가 되었지만, 여전히 자신을 시간과 공간의 세계에 묶어놓고 타인을 돕는 사람을 뜻한다. 보살이란 언제든지 떨치고 사라져서 열반에 들 준비가 된 '본질적으로 붓다'를 말한다. [134p]



그대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은 그저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누군가 그가 인간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공허한 생각일 뿐이다. 의식은 남성적이지도 여성적이지도 않다. 누군가 그가 매우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그가 아름답고 강인하다고 여기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지만, 그거슨 에고가 그대를 기만하는 공허한 개념에 불과하다. 누군가 그가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그저 무의미할 뿐이다. 그의 기계는 기억을 축적해왔고, 그 기억들에게서 기만을 당하고 있다. 이것은 모두 텅 빈 공허한 것들이다. [137p]

 

목구멍 센터는 받는 것과 주는 것의 만남이다. 그대는 그곳으로부터 받고, 그곳으로부터 준다. 그것은 '그대가 다시 어린아이가 되지 않는다면...'이라고 말한 그리스도의 말뜻이다. 그것을 요가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 된다. 그대가 다시 목구멍 센터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는 점차 그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들여다보면, 평행선이 보일 것이다. 프로이트는 어린아이의 첫 번째 단계는 구강의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항문의 단계이며, 세 번째 단계는 성기의 단계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세 가지 단계로 끝난다. 물론 그것은 매우 조악하고 초보적이고 분열적이며, 인간의 매우 낮은 기능들을 다루고 있다. 구강의 단계. 그렇다, 어린아이는 받아들이기 위해서 목구멍 센터를 사용한다. 아이가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그의 존재는 항문으로 이동한다. 그대는 죽을 때까지 입에 고착된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흡연을 한다. 이런 사람들은 구강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담배를 피우고, 마치 어머니의 모유처럼 따뜻한 것이 목구멍 센터를 통해 자나가는 것 같이 느낀다. 그들은 구강에 고착되어 있고, 베풀 줄을 모른다. 줄담배를 피우는 사람, 흡연 중독자는 사랑을 주는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는 요구만 할 뿐 내어주지 않는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들은 여성의 젖가슴에 관심을 둔다. 담배는 젖꼭지의 대용품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이 여성의 젖가슴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여성의 젖가슴에 관심을 가지며,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도 관심을 둔다. 그런 사람들은 껌 같은 것을 씹기도 한다. 혹은 포르노그래피에만 열중하거나, 가슴에만 집착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과 꿈과 상상과 환상에는 항상 젖가슴이 떠다닌다. 이들은 구강에 고착된 사람들이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모두가 베푸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인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준다. 그들에게는 목구멍 센터가 베풀어주는 센터로서 다시 사용된다. 받아들이는 것과 내어주는 것의 만남은 목구멍에서 성사된다. 받아들이고 내어주는 능력은 가장 위대한 통합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받아들이는 능력만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풍족해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불행한 채로 남을 것이다. 내어줌으로써 풍요로워진다. 사실 그대는 자신이 내어줄 수 있는 것만 소유하게 된다. 그대가 내어줄 수 없다면, 그대는 단지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그대는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게 아니며, 그것의 주인이 아니다. 그때는 돈이 주인이 된다. 그대가 그것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대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주인이 된다. 이것은 역설처럼 보이겠지만, 다시 말하겠다. 그대는 내어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만 소유자가 된다. 그대가 내어주는 순간, 풍족한 소유자가 된다. 내어줌이 그대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베푸는 것에 인색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내어줄 수 없으며, 그 상태로 멈추고 만다. 그들은 계속 쌓아가기만 한다. 그들의 축적은 스스로에게 짐이 되어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거지들도 그들보다는 더 자유롭다. 과연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그들은 받는 데에만 자신의 목구멍 센터를 사용했다. 내어주는 데 자신의 목구멍 센터를 사용하지 않은 것뿐만 아니라, 프로이트가 말한 두 번째 센터인 항문으로 이동하지도 못 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변비에 걸려 있다. 항상 축적하고 아끼기만 해서 변비에 시달리는 것이다. 나는 변비에 걸린 사람들이 모두 구두쇠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두쇠들은 분명히 변비로 고생한다.[148p]

 

궁극의 통합은 사하스라르, 즉 왕관의 차크라에서 일어난다. 이 사하스라르로 인해서 전 세계의 모든 왕, 황제, 군주, 여왕은 왕관을 사용한다. 그것은 형식적인 것이 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사하스라르가 가능하지 않는다면 군주가 될 수 없고 왕이 될 수 없다고 인식되었다. 그대가 자신을 통치하는 사람이 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통치할 수 있겠는가? 왕관의 상징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왕관의 센터에 도달한 사람, 자기 존재의 궁극적인 통합에 이른 사람만이 왕이나 여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왕이나 여왕이 될 수 없다. 자기 자신을 통치하게 된 사람만이 타일을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주인이 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대가 사하스라르에 도달할 때, 그대의 내면에 왕관, 즉 천 개의 꽃잎을 지닌 연꽃이 피어난다. 그 어떤 왕관도 그것에 비교할 수 없다. 그럴 때에만 그것은 온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상징이 된다. 그것은 온 사방의 사람들이 사하스라르에서 궁극의 통합으로 깨어난다는 점을 보여준다. 유대인들은 테두리가 없는 스컬캡이라는 모자를 사용한다. 그것이 바로 사하스라르가 있는 곳이다. 힌두교는 한 줌의 머리카팍을 허용하며, 그것을 사하스라르가 있는, 혹은 있어야만 하는 정확한 위치, 즉 정수리의 쵸티라고 부른다. 일부 기독교 종파는 머리의 그 부분을 면도하곤 한다. 스승이 제자에게 축복을 내릴때, 그는 손을 제자의 사하스라르 위에 둔다. 제자가 진정으로 스승을 받아들이고 복종하면, 그는 갑자리 에너지가 섹스 센터에서 사하스라르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151p]

 

그는 첫 번째 육체를 안나마이 코쉬라고 부른다. 이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음식의 육체이자 흙의 육체이고, 끊임없이 음식을 통해 영양분을 얻는다. 음식은 흙으로부터 나온다. 그대가 음식을 먹지 않게 되면, 그대의 안나마이 코쉬는 시들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에 대해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그대를 만들고, 수 많은 방식으로 그대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섭최하는 음식은 단지 음식이 아니다. 그것은 혈액과 골격과 골수가 된다. 그것이 그대의 존재를 순환하며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순수한 음식은 순수한 안나마이 코쉬, 순수한 음식체를 만든다.[172p]

 

음식체 안에서만 사는 사람 가까이에 가면, 그대는 방전되고 만다. 그가 그대를 삼켜버리고 만다. 그대는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은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누군가 그대의 에너지를 모두 빼앗아간 것처럼 그대는 완전히 방전되고 고갈된다. 첫 번째 육체는 빨판이며 매우 물질적이다. 그래서 그대가 첫번째 육체에 집착하는 사람들과 함께 산다면, 그대는 에너지가 없는 무기력하고 긴장하며 지루하고 졸린 느낌을 항상 받을 것이고, 자기 에너지의 가장 낮은 발판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대는 더 높은 성장을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어떠한 에너지도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 첫 번째 유형인 안나마이 코쉬에 머무는 사람은 음식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는 먹고 또 먹고 계속 먹기만 한다. 그것이 그의 일생이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에 머문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하는 일은 공기를 마시고 젖을 빨아 먹는 일이다. 어린아아의 첫 번째 임무는 음식체를 돌보는 일이다. 사람이 음식에 중독된 채로 머물면, 그는 어린아이 상태로 머문다. 그의 성장은 고통을 겪는다. [174p]

 

따라 하지 말라. 그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라. 더 생기 있고 진정성이 있으며 즉각적으로 대응하라. 길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그냥 길을 잃어라.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그대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실수는 좋은 것이다. 실수를 저질러야 한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저지르지는 말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는 말라.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서 움직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살아있지 못한다. 그대가 모든 상황을 자기 스스로 직면하고 마주할 때 그대의 마음은 성장한다. 그런 상황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대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해야 한다. 단 한 번도 남에게 조언을 구하지 말라. 자신의 손안에 자기 생명의 고삐를 잡아라. 그것이 그대의 일을 하라는 뜻으로 내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타인을 따라가는 것이 더 안전하고, 사회를 추종하고 고정된 전통과 경전을 따르는 것은 편리할 수 있다. 그대는 군중의 죽은 일부분이 되고, 군중이 가는 곳으로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대는 아무런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멘탈체, 그대의 마노마이 코쉬는 큰 고통에 빠지고 성장하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갖지 못할 것이고, 더 높은 성장을 위한 다리로서 기능하는 매우 아름답고 중요한 뭔가를 놓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센터인 물라다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어리석은 이유 때문에 살아간다. 그들은 에너지를 계속 만들면서도 그 에너지로 인해 무거운 짐을 진다. 그깨 그들은 그 에너지를 내던져버린다. 그들은 먹고, 일하고, 잠자고, 온갖 일을 하면서 에너지를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말한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낟? 너무나 무겁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던져버린다. 대단한 악순환이다! 그 에너지를 내던져버리고 나면, 그들은 다시 공허함을 느낀다. 그들은 새로운 연료, 새로운 음식, 새로운 일로 에너지를 채운다. 그리고 다시 에너지가 차면 그들은 '너무 무겁다.'라고 말한다. 어딘가에 그것을 방출해야 한다. 그리고 섹스로 방출한다. 에너지를 축적하고, 내뿜고, 다시 축적하고, 내뿜기를 반복하는 악순환이다. 그것은 너무나 어리석어 보인다.

 

가슴은 사랑을 느낀다. 가슴은 사랑을 흡수하고, 사랑이 된다. 목구멍은 표현, 소통, 나눔, 베풂이다. 그대가 타인에게 사랑을 주면, 제3의 눈 센터가 기능을 시작한다. 그대가 베풀기 시작하면, 그대는 더 높이 올라가게 된다. 받기만 하는 사람은 아래로, 더 아래로 내려가기만 한다. 베푸는 사람은 위로, 더 위로 올라가게 된다. 구두쇠는 인간이 추락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가능성이며, 나누는 자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가능성이다.

 

50년 전에 그들의 시각은 무너졌다. 과학자들은 전기 입자인 양자가 동시에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논리학자들은 이렇게 말하며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이것은 불가능하다." 물리학자들이 말했다. "우리가 어찌하겠는가? 이것은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다. 그저 그런것이다! 우리도 어쩔 도리가 없다. 양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양자가 비유클리드 방식으로 움직이고, 유클리드 기하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현실의 움직임과 실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매우 중대한 시점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것은 다른 어떤 것에서만 나올 수 있다고 늘 여겨졌다. 간단하고 자연스럽고 분명히 그렇다. 어떻게 어떤 것이 무로부터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물질은 사라진 것이고, 과학자들은 만물이 무로부터 나왔고, 만물은 다시 무로 돌아가 사라진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이제 그들은 블랙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블랙홀은 어마어마한 무의 구멍의 말한다. 나는 그것을 어마어마한 무 라고 불러야겠다. 무는 단지 부재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는 에너지로 가득 차 있지만. 그 에너지는 바로 무의 에너지이다.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지만, 에너지는 존재한다.

 

관찰해보라. 그대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면, 그대는 자신의 화를 강제로 무의식 깊은 곳에 억압할 수 있지만,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대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로 살아갈 수 있지만, 그 화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그것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화는 그대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고, 존재의 어두운 지하실에 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대는 그 위에 앉아서 웃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그것이 폭발하리라는 것을 그대는 알고 있다. 그대의 웃음은 그다지 깊지 못하고 진실하지 못하며 자기 자신을 거스르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외부로부터 질서를 강요하는 사람은 내면에 무질서한 채로 남는다. 탄트라는 또 다른 종류의 질서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대는 그 어떤 질서와 원칙을 강제할 수 없다. 그대는 단지 모든 구조를 던져버리고, 자연스럽고 자발적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이 밝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단계이다. 사회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고, 그것에 극도로 반대하기 때문에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는 특정한 질서를 원한다. 그대가 사회를 따르면, 사회는 그대를 좋아한다. 그대가 여기저기에서 약간이라도 길을 벗어나면, 사회는 화를 내고 군중은 미친 듯이 그대를 공격한다.

 

그래서 모든 남편은 아내를 변화시키려고 하고, 아내들 역시 자신의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들이 노력하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런 것일까? 왜 아내는 끊임없이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할까? 무엇 때문에? 그녀는 이 남성과 사랑에 빠졌는데, 곧바로 남편을 변화시키려고 하는 것일까? 이제 그녀는 차이점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녀는 그런 차이점들을 내버리고 싶어진다. 이 남성에게서 어떤 부분들을 쳐내고 자신이 생각하는 남성에 완벽하게 부합하도록 만들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남편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성이 노력하는 것만틈 그렇게 절실하고 완고하지는 않다. 남편은 쉽게 지치지만, 여성은 더 오래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탄트라는 부정적인 것을 표출하고 긍정적인 것을 수용하라고 말한다. 분노가 일면, 그것을 억누르지 말라. 공격성이 일면, 그것을 억누르지 말라. 탄트라는 가서 사람을 죽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억눌린 감정들을 표출하는 수많은 방법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정원에 가서 나무를 잘라라. 딱따구리를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고요해 보인다. 사냥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은 아주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우 추악한 일을 하지만 그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사냥을 할 때 무언가가 그들에게 일어난다. 동물을 죽이면 그들의 분노와 공격성이 사라잔디. 이른바 비폭력적인 사람들이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다. 그들은 화산을 깔고 앉아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못된다. 그대는 그들에 대해 편안하믈 느끼지 못한다. 무언가 위험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그대는 그것을 느끼고 만질 수 있다. 그들로부터 그런 기운에 새어 나온다. 그대는 숲 속에 가서 소리치고 비명을 지를 수 있다. 원초 요법은 비명을 지르고 짜증을 분출하는 테라피이다. 대면 요법과 원초 요법, 형태 심리학은 마니푸라를 이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남성의 병리학을 관찰해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전혀 믿을 수 없는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다. 어떤 남성은 포르노그래피를 먼저 보지 않고서는 여성과 성교를 하지 못한다. 실재가 비실재보다 덜 실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오직 비실재를 통해서만 흥분한다. 실체가 비살재보다 덜 흥미롭게 보이는 현상을 자신의 삶에서 관찰해 본 적이 있는가? 자신의 의식을 상상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적인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라. 항상 실재적인 것에 귀를 기울여라.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그대는 상상의 덫에 머물게 될 것이다. 여러 이유로 인해서 상상이 매우 만족스러워 보일 떄도 있다. 그대가 그것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신의 상상에 개입할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이 생각하고픈 대로 생각할 수 있다. 아무도 그것을 방해하거나. 그대의 상상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대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그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그릴 수 있다. 그대는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만큼 나를 상상할 수 있다. 그대의 자유이다. 에고는 너무 즐거워진다. 그래서 스승이 죽으면, 살아있을 때보다 더 많은 제자가 생기는 법이다.

 

 

 

 

 

 

 

 

 

 

 

 

 

 

 

 

 

 

 

 

 

 


 



























'Keep' 카테고리의 다른 글

How is important~!  (0) 2018.02.05
뇌의 세가지 특징  (0) 2017.12.07
멀고도 가까운_3  (0) 2017.04.09
멀고도 가까운_2  (0) 2017.04.08
멀고도 가까운  (0) 2017.04.0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