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으로부터 누군가를 구해 낼 수는 있지만, 변화나 죽음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는 그 후엔 다른 사람, 다른 무언가, 다른 장소가 된다.

전쟁은 잠잠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지고, 국가도 사라지고, 가장 근본적인 구조를 제외하고는

모두 썩어 간다. 한때 서로 전쟁을 벌이던, 육체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이 이제는 흙이 되고, 나무가 되고,

연인이 되고, 새가 된다. 모든 훈장은 낯선 이의 장난감이 된다.

대포를 녹여 만든 교회의 종이, 다시 녹아 대포가 되어 다른 전쟁에서 사용된다.

122p

 


 

신경이 없는 신체 부위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아를 규정하는 것은 고통과 감각이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아니다. 느껴지지 않는 것은 선뜻 돌봐 줄 수가 없다.

당신의 손발이 당신에게서 잊힌다. 반면에 고통은 지켜 준다.

눈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즉시 그에 대해 대처하기 마련이다.

매우 섬세하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렇지 않으면 아플 테니까. 움찔하고, 눈을 깜빡이고, 눈물이 흐른다.

나병에 걸리면, 깜빡임을 멈출 것이다.

그렇게 눈물이 마르고, 어쩌면 너무 심하게 긁어서 각막에 상처를 줄지도 모르고,

어딘가 다쳤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지도 모른다.

나병에 걸리면 보통 그런 무감각 상태가 된다.

153p


 

어떤 감정이입은 배워야만 하고, 그다음에 상상해야만 한다.

감정이입은 다른 이의 고통을 감지하고 그것을 본인이 겪었던 고통과 비교해 해석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그들과 함께 아파하는 일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지

당신 스스로에게 해 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이야기,

그 사람 혹은 그런 사람들은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이야기들 때문에,

그런 감정이입이 차단될 수도 있다.

사회 전체가 자신은 경계에 있는 소수자들과 무관하다고 여길 만큼

무감각해지도록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마치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맺은 인간적 관계를 지워 버리는 사람들이 있듯이 말이다.

감정이입 덕분에 당신은 고문, 배고픔, 상실의 느낌을 상상할 수 있다.

당사자를 당신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고통을 당신의 몸이나 가슴, 혹은 머리에 새기고,

그다음엔 마치 그 고통이 자신의 것인 양 반응한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를 확장해 당신과 연대한다는 의미이며,

당신이 누구와 혹은 무엇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느냐에 따라 당신의 정체성이 구축된다.

신체적 고통이 자아의 신체적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동일시는 애정 어린 관심과

지지를 통해 더 큰 자아라는 지도의 경계선을 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정신적 자아의 한계는 더도 덜도 말고, 딱 사랑의 한계다.

그러니까 사랑은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은 끊임없이 뭔가를 덧붙여 가고, 가장 궁긍적인 사랑은 모든 경계를 지워버린다.

157~158p

 


 

대파괴나 두려운 어떤 일과 나 사이에 담을 세우고 나면,

그다음엔 종종 삶 자체와 나 사이에 담이 세워지기도 한다.

담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방치하면 그 담이 세워지기도 한다. 담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채 방치하면

그 담이 질병처럼 스스로 커진다. 나병환자들은 단지 신체적인 감각만을 잃었을 뿐이다. 종종 그들의 고통 주변에서

도덕적, 감정적 감각을 잃어버리는 이는 나머지 사람, 우리다.

실제로는 소수의 사람만 감염되는 박테리아에 의한 질병이었지만, 거의 1000년 동안 나병은

전체 사회의 심리적 장애였다는 이야기다.

무감각이 자아의 경계를 수축시키는 것이라면, 감정이입은 그 경계를 확장한다.

남미의 나환자촌을 방문했던 게바라에게 일어난 변화를 각성이라고 불러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확대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을 자신 안에 받아들였으며,

그렇게 그의 경계는 밖으로 확대되었다.

162p

 


 

나방이 눈물을 마신다.

눈물을 마시는 나방은 라크라파고스, 인간의 살을 파먹는 종은 안트로포파고스라고 한다.

우리는 늘 슬픔을 먹고 산다. 그것이 아름다운 서정시와 대중가요의 본질이며, 슬픔과 상심이 그렇게

달콤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감정, 즉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정이입과 혼자가 아니라는

작은 위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슬픈 노래를 들으면 우리는 미묘한 비통함을 느끼는데,

마치 3분 동안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상실을, 소금기가 있는 눈물 같은 슬픔을 다시 떠올리고 애도한 후,

노래의 마지막 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그 슬픔을 닫아 버리는 것만 같다.

파란 석양빛 같은 슬픔은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가는 것임을, 시간이 있기에

변화가 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변화의 또 다른 이름이 상실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슬픔도 아름답다.

아마도 그것의 참된 울림과 아득한 깊이 때문일 것이다.

 


 

나(I)는 누군가에게 유용한 바늘이다. 하지만 거기에 뀌는 실은, 물론 그림자다

라고 브렌다 힐먼이 자신의 시 수트라 끈이론에 적었다. 영어와 라틴어에서 뀌매다 라는 뜻으로 쓰이는

산스크리트어의 수트라 혹은 고대 인도어의 하나인 팔리어의 수타를 어근으로 하고 있다.

두 단어 모두 바느질과 관련이 있다. 불교의 가장 성스러운 경전 수트라가 그런 이름을 가지게 된 이유는

최초에는 경전을 끈으로 꿰어서 만들었기 떄문이다. 야자수 잎을 두 개의 끈을 사용해 접이식 블라인드처럼

묶었던 것이 경전이었다. 부패하기 십상이던 해당 지역의 기후 탓에 그 경전은 또 다른 책으로 베껴지고

또 베껴졌다. 그런 식으로 야자수 잎 묶음이 책이 되고, 지식은 하나로 묶인 채로 실을 따라 하나의 선,

혹은 하나의 계통으로 전해졌다.

196P


 

하지만 가끔은 사랑도 어둠이다. 떄로는 밝은 빛을 가려야만 할 떄도 있다.

침대로 들어가기 전에 불을 끄듯이.

사막에서 생확하다 보면 그늘을, 그림자와 어둠을 사랑하게 된다.

그늘은 당신을 태워 없애거나 바짝 마르게 하는 불볕을 피할 휴식처를 제공한다.

추위가 북극의 가장 큰 야수라면, 더위는 사막의 약탈자다.

사막의 빛은 사납다. 한낮에는 그 빛이 만물을 거칠고 단단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른 오전이나 늦은 오후가 되면 그 빛은 황금빛으로 물들고,

풍경 속 모든 절벽, 습곡, 봉우리는 빛과 그림자만 있는 깊은 휴식에 빠진다.

그런 시간에는 낮과 밤이 마치 무희처럼 연인처럼 한데 엉키고, 그림자도 그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빛만큼의 혹은 그보다 더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림자는 해가 완전히 지평선 아래로 넘어갈 때까지 점점 더 길어지고,

그 후에는 어둠이 지면 위를 흐르는 물처럼 퍼져 간다.

273~274P

 


 

진로는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말 그대로 한번에 한걸음씩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완벽한 예술 작품이다.

길이 꺽인 걸까. 한가지 길밖에 없는 걸까. 어디까지 가야 하는 걸까.

출구와 입구가 같은 걸까.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을 여정 중에 자신의 손과 눈 그리고 발로 찾아야 한다.

미로 안에는 희미하고 낮은 베이스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계속 울린다.

그 소리는 관람객에게 자신이 어딘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자신이 갇혀 있고, 어딘가에 담긴 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조금씩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아무런 확신 없이, 알지도 못한 채. 보이지도 않는 상태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나아간다. 막다른 곳에 이르면 벽과 벽 사이가 좁아지고,

처음 미로에 들어와 뒤에서 문이 닫혔을 때처럼 깜깜한 암흑이 된다.

그러면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다. 마치 폐소공포증에 걸린 것 같은 상태지만. 그럼에도

나는 어둠이 나를 껴안는 것을 느꼈다. 종착지, 일부러 만들어 낸 밤이었다.

거기까지 갔다가 돌아 나오기까지 10분에서 15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미로 안의 시간은

그렇게 시계로 측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분리된 시간, 상징적인 시간이었고, 미지의 것,

알아낼 길 없는 것의 한가운데로 가는 여정이었다. 그해 여름, 나는 그 미로를 찾고 또 찾았다.

 


 

그날의 기억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결혼식에 참석한 사람 중 살아 있는 이는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사진은 그들을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젊고 씩씩하게, 다음 반세기 동안 자신에게 벌어질 일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상태로 보여 준다. 사진은 모서리가 조금 말렸다는 것만 제와하면 달라지지 않았고,

샏고 바래지 않았다. 작고 뾰족한 면사포 뒤로 보이는 어머니의 표정도 씩씪하다. 사진 속 어머니에게

훗말을 경고할 수 있다면, 그건 아마 나의 존재를 지우는 일이 될 것이다.

어머니가 꼈던 결혼 반지, 작고 동그란 터기옥이 케이크나 쿠키의 과자 장식처럼 박혀 있던

그 금반지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지만, 방한 토시는 뜯어지거나 버려졌을 망정, 반지의 금은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생명이 없는 것은 죽지도 않는다.

나무로 만든 종이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든 것도 몇 세기는 유지된다.

하지만 우리는 닳아 없어진다. 어머니의 양모 정장은 그것을 알고 있거나, 그것을 아꼈던 모든 사람들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양모나 실크일 뿐인데도 그렇다. 돌이나 금속, 나무는 훨씬 오래 유지된다.

아직 아무것도 적지 않은 종이의 흰색과 무언가를 썻다 지운 후의 흰색은 같으면서 같지 않다.

말을 하기 전의 침묵과 말을 한 후의 침묵도 같은 침묵이면서 같은 침묵이 아니다.

눈은 만물이 성장하는 시기의 앞과 뒤에 내린다. 내가 어머니와 화목한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는,

나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과 어머너의 기억이 희미해진 후였다.

어머니 당신이 지워지고 있었다. 다시 흰색으로 돌아간, 부재를 향해 가는 종이처럼.

 


 

복수와 용서, 우리가 서로에게 보였던 그 두 가지 단호한 행동 방식은, 어떤 계산에 따른 결과였을 것이다.

마치 잘못된 행동이 빚이 되고 그것을 회수하는 것이 복수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우리 마음은 '당신이 끔찍한 짓을 했으니, 나도 끔찍한 짓으로 되돌려주겠다. 그러면 비긴 셈이니까.'

혹은 '내가 용서하겠다. 나의 너그러움으로 당신의 빚은 청산되었다.'라고 생삭하는 것 같다.

어쩌면 '용서'라는 말은 엉뚱한 곳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용서란 대부분의 경우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 자신에게 주는 것이니까.

당신은 오래된 괴로움이라는 추한 짐을 내려놓고, 끔찍한 것과 이어져 있던 끈을 풀어 버리고,

거기서 멀어진다. 용서란 공적인 행동, 혹은 두 당사자 사이의 화해이지만,

용서가 마음속에서 벌어질 떄 그 과정은 좀 더 불명확하다.

갑자기 혹은 서서히 무언가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마치 어떤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그것을 넘어선 것만 같다. 그러다 그 무언가는

그것에서 벗어난 당신 스스로를 축하하려는 바로 그 순간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나의 침실 바닥을 차지했던 산더미 같은 살구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수수께끼였고 초대였다. 상상려고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살구를 처음 우리 집에 들이던 날, 그 살구 더미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한 상징이었다.

1년이 지나자 그 불안정한 과일 더미는 당시 내 삶을 보여 주는 듯했다.

잘 구분해야 할 삶, 달콤한 부분만 남기고 상한 부분은 도려내야 할 삶이었다.

그것으로 잼과 절임, 리큐어를 만들었다. 남은 열매는 가까운 사람들, 긴급한 상황에 나를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 역시 열매를 먹고 리큐어도 꽤 마셨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 살구가 일종의 권유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 집에 도착하면서 시작된 그 이야기를 하라는 권유 말이다.

마치 어머니의 선물처럼, 혹은 어머니의 나무가 남긴 선물처럼, 그 살구 더미는

그 시기의 혼란을 하나의 이야기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 내는 촉매제가 되었다.

덕분에 나는 이야기를 만들고 바꾸어 가는 일을 꼼꼼히 살피고, 그 사이사이에

침묵을 배치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것은 온전한 것이 되었다.'라고 버지니아 울프는 적었다.,

그녀는 이어서 이렇게 적고 있다.

" 여기서 온전함이란 그것이 나를 다치게 할 힘을 잃었음을 의미한다. 갈라진 조각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이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아마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떄문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글을 쓰다가 무엇이 무엇에 속하는지를 발견할 떄 느끼는 희열도 그렇다. 여기서 나는

내가 철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에 도달한다. 어찌되었든, 원단의 뒷면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게 마련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우리는,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그 패턴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 세계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이며 우리는

그 예술 작품의 일부라는 생각 말이다.'

 


 

물리치료사가 내게 해 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성 통증 같은 경우에도 환가자 그 고통을 다르게 경험하도록

훈련시키면 치료가 가능하다고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단 환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그것이 자신의 비극일지라도, 그 이야기 때문에

본인이 불행할지라도 계속 이야기한다. 혹은 그 이야기를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일관성을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어느 부분은 죽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는 것보다 죽음이 먼저 오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의 죽음은 스스로 익숙한 자기 모습의 죽음이기 때문에.


 

명심하자.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가장 허술한 배처럼 물 샐틈이 많고, 삶의 대부분을 다른 누군가로 살아간다.

오래전에 죽은 사람, 한 번도 살아 본 적이 없는 사람,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낯선 이로 살아간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상적인

'나'는 사실주의 소설에 특히 자주 등장하는 물 샐 틈 없이 단단한 그릇 같지만, 사실 그 '나'는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경험하는 그 많은 틈들을 하나도 담아내지 않는다. 풀려 버린 끈, 낯선 꿈, 망각과 잘못된 기억. 다른 이들의 이야기 안에서

살았던 삶, 앞뒤가 맞지 않는 일과 일관성 없는 일, 데우스 엑스 미키나의 장. 가까이 있는 유령 같은 것.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3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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